
술래잡기
카가미 히이로 × 호죠 에무
w.슭곰
"수고하셨습니다, 카가미 선생님."
수술이 끝난 후 주변을 메우는 동료들의 인사 소리에 카가미 히이로는 고개를 가볍게 까닥이며 화답했다. 모처럼의 장기 휴가를 바로 코 앞에 앞둔 날이었다. 그 것도 호죠 에무와 날짜까지 맞춰서. 에무와 교제를 시작한 지도 이제 2년 째. 그동안 게임 수술이며, 신약 개발 등에 몰두하느라 바쁘게 살아온 그들은 드디어 저들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었고, 함께 휴가 계획을 짜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휴가 날짜를 잡고, 그 날짜를 맞추기 위해 약 2주 전부터 히이로는 물론이고 에무도 마찬가지로 부던히 애를 썼다. 그야말로 미친듯이 일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드디어, 에무와 휴가를 즐길 수 있는 그 날이 온 것이다. 이 휴가는 에무에게도 중요했지만, 히이로에게 있어서도 무엇보다 중요했다. 반드시 성공적으로 끝나야 할. 옷을 갈아입던 중 아직 옷걸이에 걸려있는 제 겉옷을 잠시 만지작거린 히이로는 빠르게 그 옷을 꺼내 입었다.
사실 본격적인 휴가는 내일이지만, 오늘 퇴근 후 만나 함께 움직이기로 미리 말을 맞춰둔 참이다. 에무는 일이 끝나면 퇴근하기 전에 반드시 CR에 얼굴을 비추곤 했다. 아마 지금 이 시간쯤이면 CR에 있겠지. 그렇게 가늠한 히이로는 캐비넷을 닫으며 출근했을 당시의 정장 차림을 갖춘 채로 걸음을 옮겼다.
CR의 문이 열렸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회의실을 겸하는 휴게실이다. 가운데에 놓인 넓은 테이블과 그 테이블을 둘러싼 의자가 여러개. 다양한 모니터들과, 의료 기구들, 냉장고. 그리고 뽀삐와 단 쿠로토의 게임기. 비치된 가구들은 그대로인데 휴게실은 아무도 없이 매우 조용했다. 모르긴 몰라도 단 쿠로토는 휴게실을 비우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게임기의 화면도 꺼진 채 그대로. 이렇게까지 CR 휴게실에 아무도 없는 것은 참 드문 일이었다. 히이로가 무심코 자신이 늘상 앉아 케이크를 먹곤 했던 자리로 움직였을 때, 책상 위에 무언가 적힌 하얀 메모지가 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깔끔한 흰 종이 위에 단정한 글씨체로 몇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히이로 씨. 숨도 돌릴 겸 술래잡기 어떠세요? 술래는 저예요. 지금 CR 밖으로 나가시면 힌트를 줄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럼 술래를 잡을 때까지 화이팅!」
화이팅! 이라고 적힌 그 끝에는 웃는 모양의 이모티콘도 그려져 있다. 메모의 내용을 확인한 히이로는 잠시 하아, 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 소리를 내었다. 화가 났다기 보다는 맥이 빠졌기 때문이다. 호죠 에무는 가끔씩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할 때가 있었다. 옛날이었으면 꿈도 못 꾸었을 일이지만, 이미 에무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히이로는 에무가 내건 장난에 조금 어울려 줄 마음이 들었다. 메모지를 접어 재킷 주머니에 잘 넣어둔 히이로는 적혀있던 대로 아까 들어왔던 문을 다시 열었다. 막상 앞엔 아무도 없어 잠시 의아한 눈을 하자 바로 옆에서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쪽이야. 이 쪽."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벽에 기대서 있는 파라드가 보였다. 대충 아는 얼굴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시작부터 파라드가 나오다니, 좀 의외로군. 그리 생각하며 파라드를 마주보자 그는 변함없이 활짝 웃는 그 얼굴 그대로 말했다.
"에무의 도전장은 확인했지?"
"확인했으니 힌트부터 내놔."
"정말 주기 싫어지는 말투네. 모처럼 에무가 널 위해서 만든 이벤트란 말이야. 제대로 어울려 주라구."
히이로는 살짝 미간을 찡그린 채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파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파라드의 표정은 금방 부루퉁하게 변한다. 맘 같아서는 깽판이라도 놓고싶지만 에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이 날을 위해 에무가 없는 시간을 쪼개 얼마나 고심하며 준비했는지도. 나는 에무, 에무가 행복하길 바라. 파라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부루퉁한 표정을 지우고 주머니에서 히이로가 기다리는 힌트를 꺼냈다. 그리고 그 것의 양 쪽을 붙잡고 히이로의 눈 위를 덮도록 냅다 씌웠다.
"이봐, 파라드! 대체 무슨…!"
그 힌트란 것이 바로 안대였다. 갑자기 캄캄해진 시야와 함께 개구지게 웃는 파라드의 웃음 소리가 들린다. 파라드는 그제서야 저에게 내밀어진 히이로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이끌기 시작한다.
"얌전히 따라오기나 해."
병원 안을 파라드와 손을 붙잡은 채 걷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어쩐지 내키지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금 자신은 이 상황에 대해 알고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아마도 에무의 공모자일 이 손의 주인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잠자코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달라졌다. 좀 더 시원했다. 아무래도 야외로 나온 모양이다. 그렇게 공기가 달라진 이후로도 몇 걸음 더 걸은 뒤에야 파라드가 멈춰섰다. 덜컹하고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차에 타면 돼. 앗, 안대 벗지마."
파라드의 목소리와 함께 큰 손이 히이로의 머리 위를 감싸며 차에 타는 중에 부딪히지 않도록 도왔다. 앞을 더듬거리던 히이로가 겨우 차의 뒷좌석에 타고 나서야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창문 밖으로 파라드가 신신당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기사님이 내려줄 때까지 절대 안대 벗으면 안 돼. 벗으면 에무가 엄청엄청 실망할 거야."
자. 그럼 출발~! 파라드의 신호로 곧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뒷좌석에 앉아 가만히 있던 히이로는 '대체 어디로 가는겁니까.' 하고 파라드가 말한 기사님에게 한 마디를 던져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 뿐이었다. 꼭 납치라도 당하는 기분인데다가, 시야가 계속 가려져 있는 느낌이 영 껄적지근했다. 사실 감시할 파라드도 없으니 살짝 안대를 벗을 수도 있었지만 파라드가 마지막에 남긴 에무가 엄청엄청 실망할 거라는 말이 결국 히이로의 행동에 제약을 걸었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히이로가 잠자코 차가 목적지로 도착하기를 기다릴 무렵, 드디어 차가 멈췄다. 그리고 침묵 또한 깨졌다.
"이제 안대를 벗어도 좋아. 카가미 선생."
"당신…?!"
히이로는 황급히 안대를 벗어제꼈다. 한동안 캄캄하던 시야에 갑자기 밝은 빛이 들어와 눈이 부셨다. 잠시 눈가를 찡그리며 빛에 익숙해진 히이로의 눈에 비친 것은 운전석에서 뒤돌아 본 자세 그대로 싱글싱글 웃고 있는 단 쿠로토였다.
"…기사가 당신이었나."
"그래. 에무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내가 뭐하러 이러고 있겠어."
그 말과 함께 품을 뒤적인 쿠로토는 히이로에게 길다란 흰 봉투를 내밀었다. 미심쩍은 눈으로 그 봉투를 받아든 히이로는 쿠로토를 슬쩍 살피며 내용물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파라드 때와 달리 별 제재는 없었다.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두 장의 티켓이었다. 내일 날짜인 비행기 티켓. 예상도 못한 물건이 나와 히이로는 놀란 눈을 하며 쿠로토를 다시 한번 바라봤으나, 쿠로토는 제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듯이 오히려 뭐냐는 듯한 눈빛을 되돌려 주었다. 사실 휴가 계획을 잡으면서 에무와 상의를 했을 때 해외 여행를 가자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에무는 그래도 게임병이 완전히 사라진게 아니니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것을 맘에 걸려했다. 그렇게 무산된 계획이었는데. 심지어 티켓의 목적지는 히이로가 제안했던 나라였다.
"안 내리고 뭐해?"
히이로의 상념을 쿠로토의 목소리가 깨부순다. 어서 내리라는 듯이 바깥을 향해 눈짓한다. 히이로는 그제서야 티켓이 담긴 봉투 또한 잘 챙겨 차에서 내렸다. 내리기 전, 단 쿠로토는 한 마디를 던졌다.
"이 바쁜 몸이 모처럼 시간을 내서 거들어 줬으니, 끝까지 제대로 클리어 하길 바라. 카가미 선생."
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히이로는 지금 자신이 도착한 곳을 제대로 둘러볼 정신이 들었다. 주변을 가볍게 둘러본 히이로는 바로 자신의 정면에 있는 건물을 보고는 잠시 생각을 멈췄다. 히이로의 기준에선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된 웨딩샵이 그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하자는 거지? 날 왜 여기에다? 혼란한 머릿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샵의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스나였다.
"아앗~ 히이로! 도착했구나! 어서 와, 어서 와!"
그러나 텐션은 뽀삐 삐뽀빠뽀로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히이로는 손을 크게 흔들며 방방 뛰는 아스나의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한 달음에 뛰어나온 아스나는 히이로의 팔에 제 팔짱을 끼며 샵의 안으로 걸음을 이끌었다. 그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뿐이다.
"뽀삐 삐뽀빠뽀."
"지금은 아스나! 라고 불러야지."
"대체 날 왜 여기로 데려온 거지? 연수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에무가 연수 과정을 모두 마치고 전문의가 된 이후, 그리고 에무와 사귀기 시작한 뒤로부터는 히이로도 에무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데 갑자기 히이로가 옛날에 부르던 칭호를 꺼낼 때는 대부분 심기가 불편할 때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히이로의 얼굴을 마주하고도 아스나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지금은 히이로를 위해서, 라고 생각해주면 안될까? 에무가 열심히 준비했는 걸."
또다. 파라드가 했던 말. 에무가 절 위해서 열심히 준비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 버그스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에무의 편이로군. 히이로는 괜히 삐딱한 마음이 들었지만 결국은 몸에서 힘을 빼고 아스나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에무에게 약해지는 것은 이제 아마도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으니.
"자. 시간 없으니까 어서 들어가서 갈아입고 나와!"
탈의실 안으로 히이로의 등을 살짝 밀어 넣은 아스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손을 흔들며 탈의실의 문을 쾅 닫았다. 제법 넓은 안엔 전신 거울이 있다. 조금은 심기가 불편해보이는 제 모습이 어정쩡하게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리고 옆의 벽엔 검은 옷이 한 벌, 옷걸이에 걸려있다. 자세히 훑어보니 웨딩 턱시도였다.
"……."
순간 히이로는 할 말을 잃고 가만히 벽에 걸린 턱시도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무. 네가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생각해 봐야 나오는 답은 없었다. 히이로는 그제서야 이 게임을 빨리 클리어 해야겠다는 의욕이 생겼다. 클리어의 끝에는 술래인 에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답은 에무에게 들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에게 꼭 해주어야만 할 일도 있었다. 히이로는 저가 입고 있었던 정장의 재킷을 벗으며 벽에 걸린 턱시도로 갈아입었다. 맞춘 것처럼 몸에 꼭 맞았다. 탈의실 한 켠에 놓인 구두까지 신고 나서 문을 열고 나간다.
"와아. 잘 어울리잖아, 히이로."
기다리고 있던 아스나의 얼굴이 활짝 편다. 히이로는 조금 멋쩍은 기분이 되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턱시도를 입어볼 일이 아예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입게될 줄도 몰랐다. 히이로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있자, 아스나는 다시 한번 히이로를 이끌며 샵의 문을 열었다.
"나가 봐. 다음 순서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스나가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로 말한다.
"……하."
그래. 뽀삐 삐뽀빠뽀 때까진 좋았지. 샵의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던 이를 만난 히이로는 그만 기가 찬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뭐야, 그 표정은?"
상대방의 얼굴도 대번 불쾌해진다. 건들한 자세로 바이크 위에 앉아있던 쿠죠 키리야는 히이로에게 헬멧을 가볍게 던져주었다. 히이로는 그가 던진 헬멧을 잡은 채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다.
"단 쿠로토 불러 와."
"신님은 이미 갔는데?"
"아니면 감찰의, 네가 그 차를 다시 끌고 오던지."
"미안. 내가 차를 안 받는 체질이라서."
"……."
헬멧을 잡고 있는 히이로의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간다. 그런 히이로의 상태를 뻔히 알면서도 키리야는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실실 웃으며 제 뒷좌석을 팡팡 친다. 빨리 타~ 우리 에무 기다린다? 일단 골까진 가기로 하지 않았던가. 히이로는 그렇게 자신을 달래며 헬멧을 썼다. 그리고 키리야가 탄 바이크의 뒷좌석에 올라타면서도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연수의가 왜 너네 에무냐. 키리야가 소리높혀 웃었다.
시동이 걸린 바이크는 미끄러지듯 빠른 속도로 차도를 달렸다. 헬멧을 쓰고 나서야 안 사실이지만, 고글을 내리자 시야가 바로 차단되었다. 고글에 무슨 짓을 해놓았는지, 아까 안대를 낀 것처럼 검어진 것이다. 차에 탄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인해 히이로는 키리야를 꽉 붙잡고 목적지에 도착하길 기다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아까 차로 이동했던 것보다도 더 이른 시간에 바이크가 멈췄다. 헬멧을 벗자 아는 장소가 보였다. 근교의 작은 교회. 신청을 하면 예식장으로 대여를 해주는 곳이었다. 또한, 히이로가 며칠 전부터 대여 신청을 망설이다가 결국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던 곳이기도 했다.
"여긴…"
"왔으면 내리지 않고 뭐하냐."
교회를 바라보는 히이로를 향해 말을 건 것은 교회 앞에 서있었던 하나야 타이가였다. 가운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자세로, 그러나 다른 팔 한쪽엔 제법 크기가 큰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모습으로 터덜터덜 다가온 그는 불쑥, 히이로의 앞에 옆구리에 끼고 온 상자를 내민다. 리본같은 장식도 없이 깔끔하기만한 흰 상자다. 갖고 들어가. 그리고 엑제이드에게 건네 줘. 그 말과 함께 하나야는 상자를 히이로의 품에 안겨주었다. 상자를 받은 뒤로도 교회의 모습에 정신이 팔린 듯 멍하게 서있는 히이로를 보던 하나야는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는 멍하니 선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서, 히이로의 등을 밀며 교회의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만에 교회의 입구에 도착한다. 그제서야 히이로의 등에서 손을 뗀 하나야는 두어 걸음 물러선다. 도착하고서도 선뜻 문의 손잡이에 손을 뻗지 못하는 히이로를 향해 하나야가 그를 불렀다. 브레이브.
"그 길이 네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면, 돌아 보지말고 가라."
히이로는 뒤에 선 하나야를 향해 고개를 돌릴 듯 하다가 멈춘다. 뒤에 선 하나야가 피식 웃었다. 그는 히이로의 뒤에서 물러나 교회 건물의 모서리 뒤로 사라진다.
하나야가 사라진 그 뒤, 히이로는 문의 손잡이에 겨우 손을 얹었다. 잡고, 힘을 주며 문을 밀었다. 교회 내부는 히이로도 익히 알고 있는 구조다. 예식을 올리기에 부족함없이 단정하고, 빛나게. 양 옆에 늘어선 의자들엔 아스나를 비롯하여 니코, 하이마 원장과 단 쿠로토, 파라드에 아마도 뒷문으로 들어온 듯한 하나야와 키리야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가운데, 하얀 카펫이 깔린 길의 끝에는 호죠 에무가 서있었다. 히이로가 입고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이지만 색만은 순백인 턱시도를 입고 있는 호죠 에무가 히이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길을 걸어가면 걸어갈 수록, 보고 싶었던 그 웃는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축하드려요, 히이로 씨. 클리어 하셨네요."
"어지간히 애 먹이는 술래였지만,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턱을 당겨 들며 당당한 어조로 대답하자 퍼지듯이 에무의 웃음 소리가 들린다.
"실패를 모르는 천재 외과의죠."
에무의 웃음은 언제부턴가 전염되고는 했다. 히이로는 결국 그를 따라 조금 웃고 만다.
"히이로 씨."
에무의 손이 히이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히이로는 자신을 부르는 에무의 모습을 빤히 바라본다. 말갛게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 둥그런 눈매 안의 검은 눈동자. 언제나 희망을 담고 반짝반짝 빛이 나 보고 있는 자신마저 울릴 것 같은 그 눈이.
"제대로 격식을 차린 자리는 아니지만요. 저와─"
"에무."
히이로는 에무의 말을 가로막는다. 말이 막힌 에무가 자신을 빤히 바라봤다. 잠시 히이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마주치고 있자, 에무의 눈에 잠시 불안함이 감돈다. 그때서야 히이로는 아까 하나야가 들려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끝이 레이스로 마무리 된 하얀 면사포가 가지런히 접혀 있다. 히이로의 손을 따라 그것을 발견한 에무의 얼굴에 의문이 담겼다. 이건 내가 준비한 게 아닌데,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다른 녀석들이 몰래 준비한 모양이지. 히이로는 상자에 담긴 면사포를 꺼내 펼치고는 에무의 머리 위에 가볍게 얹었다. 나풀나풀 하늘을 날았던 베일 자락이 에무의 어깨를 덮고 등 위로 내려앉는다. 아무래도 면사포까지 쓸 생각은 못 했는지 자신을 덮고 있는 베일들이 어색한 듯 에무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렸다. 그 사이에 히이로는 줄곧 갈아입은 턱시도의 안 주머니에 자리 잡고 있던 물건을 꺼냈다. 고급스런 검붉은 천이 뒤덮힌, 손바닥에 놓일 만한 사이즈의 케이스다. 히이로가 꺼낸 물건을 본 에무의 움직임이 멈췄다.
"알고 있었지, 에무. 내가 이걸 준비해 놨다는 거. …하지만 네게 건네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게. 음… 네. 저번에 히이로 씨가 차에 태워서 집까지 데려다 주셨을 때요. 졸고 있던 저에게 재킷을 덮어주셨잖아요. 그 때."
히이로가 케이스를 연다. 두 개의 똑같은 반지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그가 반지를 준비한 지는 꽤 되었다. 아마 저번 달이었던가. 에무와 교제를 시작하고, 그와 관계를 이어나간지도 2년. 기간만을 따지자면 이르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히이로가 에무와 함께 한 시간들을 모두 더해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기간. 히이로는 드디어 결론을 지을 수 있었다. 연수의. 아니, 에무. 아마 이제 날 웃게 할 수 있는 것은 네가 아니면 안 될 것이라고. 에무는 소멸한 그녀의 미소를 되찾을 생각만을 하는 히이로를 유일하게 웃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히이로는 이제 에무에게 보답하고 싶어졌다. 에무는 곧잘 웃고, 어느 때에나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히이로는 그의 웃음에 한 자락, 행복을 더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이 반지를 네게 건네면 너는 어떤 반응을 할까. 처음엔 당황한 얼굴로 반지를 받아들고, 히이로가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면 아마도. 아마도 히이로가 그를 본 이래 가장 환하고 아름답게 웃지 않을까. 에무가 지어줄 미소를 상상하면 히이로의 입술엔 무심코 미소가 그려지고 용기가 샘솟았다. 하지만 곧바로 그의 용기에 따라붙어 그것을 깎아내리는 것은 죄책감이었다. 나는 과연 그녀를 뒤로 하고 이럴 수 있는가.
"히이로 씨가 무엇때문에 망설이고 있는건진 알고 있어요."
에무의 시선이 잠시 히이로의 손 위에 있는 반지 케이스 쪽에 머물렀다.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것도요. 저도 히이로 씨만큼 고민하고 고민했는걸요. 하지만. 말이 멈춘다. 잠깐의 호흡. 에무는 고개를 들어 똑바르게 시선을 마주쳐 왔다.
"히이로 씨가 행복하길 원해요. 그리고 저도 행복해지고 싶어요. 히이로 씨와 함께요."
히이로는 이 순간 생각한다. 에무는 영악하다. 하지만 그만큼 사랑스러웠다. 결국은 그가 스스로 이 반지를 꺼낼 수 밖에 없게 만들었으니. 사키. 나는 이제 너와의 시간을 뒤로 하고 웃으며 행복할 수 있는 이 길을 걸어도 될까. 히이로는 망설임을 잘라내고 반지의 하나를 들어 에무의 왼손을 가볍게 잡아 올렸다. 곧게 뻗은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면 제 자리처럼 어울렸다. 뒤이어 히이로가 제 왼손을 내밀자 그의 뜻을 안 에무 역시도 환하게 웃으며 남은 반지를 들어 그의 네번째 손가락에 끼웠다. 두 개의 왼손에서, 두 개의 똑같은 반지가 빛났다. 그 찬란함과 벅차오름을 참지 못하고 히이로는 눈앞의 에무를 있는 힘껏 끌어 안는다. 이제 참을 수가 없어. 참고 싶지가 않다.
"에무. 부디, 평생을 나와 함께 해줘."
"…네. 히이로 씨."
몇 번이고 히이로가 속으로 곱씹으며 삼켰던 말을 이제서야 건네자, 에무는 기쁘게 대답했다.
